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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의 주재 (사도행전 17:22-31)

이방인의 신앙은 그 뿌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에 기초한다. 따라서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창조를 마음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전 세계 온 성도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첫머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시작한다. 이 고백에는 우리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으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있어 최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우리 신앙의 대전제다. 그것은 이미 살펴본 바, 신앙고백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도들이, 그리고 또 우리가 그렇게 믿고 고백하는 것은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선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천지, 곧 만물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명제이다.

또,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태초부터 계셨던 그분이 바로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고 설명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시다(요11:14).


바울의 철학적인 전도?

사도행전 17:22-31은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하는 내용이다. 아덴은 오늘날의 ‘아테네’를 말한다. 그리스의 수도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그곳은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였다. 18절에 나오는 ‘에비구레오’, ‘스도이고’는 각각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를 말한다. 바울은 그 철학자들과 논쟁도 했다고 한다.

그곳 사람은 다분히 철학적이었고, 종교적이었다. 22절에 보면 아덴 사람들에게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고 했다. 이 종교성 많은 아덴 사람들에게 바울은 어떻게 접근했을까? 바울은 바로 그들이 섬기는 ‘신(神)’-그들도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알게 하겠노라며 설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유일하신 신-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곧 ‘천지의 주재’이심을 강변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17:24)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를 실패하고 말한다. 너무 철학적으로 접근했고, 또 너무 지식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진리를 전한 전도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전도에 실패란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율법 없는 자들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고전9:21).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렇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율법 없는 자들에게 율법은 먼 나라의 이야기와 같다. 실제로 바울은 아덴에서 몇몇 이방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17:34) 사람들이 바울의 아덴 전도를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수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표적인 물량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서, 특히 아덴 철학자들에게서 접촉점을 찾았던 것이다. 그들은 많은 신전을 손으로 짓고 그곳에 신의 이름을 새기었지만, 그들은 그 신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울은 어떤 곳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단을 보았다고 한다(행17:23). 아덴 사람들은 많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요4:22).

바울은 이 점을 파고들어, 참신은 ‘천지의 주재’이시기 때문에 사람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도 않고,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도 아니라고 전한다(24-25,29).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으며(27), 심지어 우리를 ‘신의 소생’, 즉 ‘하나님의 자녀(offspring)’로 삼아 주신다고 전한다(28-29). 그리고 결국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바로 그분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31). 만물의 창조, 온 천하에 대한 심판, 죽은 자의 부활...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류가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 그리고 죽은 자에게 부활이 있다는 것...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를 몰랐던 이방인이었다

우리는 원래 이방인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지언정,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있으며, 더불어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믿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복음의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었다.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전했던 복음의 내용은 간단했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행5:42;9:22;17:3).

하지만 율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양상이 다르다. 이방인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한다고 해도 별 반응을 얻지 못한다. 반면에 유대인은 즉시 반응한다. 기뻐하거나, 대적하거나...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먼저 알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가 죄인임을,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게 해야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방 문화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문명 역시 이방 문화와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이해 없이 오직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을 외치는 것은 신앙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그것은 마치 몰래 유출된 기말고사 시험지의 답만을 외우는 것과 같다. ‘1번, 4번, 3번, 2번, ...’ 그것은 참 지식이 아닐뿐더러, 그런 구원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판을 쳤다. 바울서신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단은 바로 이 영지주의를 일컫는다. 영지주의는 물질은 악하다고 말하는 이단이다. 그래서 그들은 선한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그들은 적그리스도라고 지적한다(요일2:22;4:2-3;요이1:7).

이러한 영지주의는 바로 하나님의 믿는 신앙이 이방 철학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 가운데 만연되어 있는 또 다른 영지주의는 바로 ‘이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영혼과 육체를 선악의 대립으로 보듯이, 이원론자들은 교회와 세상을 또한 선악의 대립으로 이해한다. 소위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추앙하며, 육체와 물질적인 것을 비하한다. 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사상이다. 영혼이나 육체나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교회와 세상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다.

바울의 아덴 전도에서 보듯이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창조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신앙적 뿌리는 여전히 무속신앙과 여러 이교(異敎)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뿌리를 하나님의 창조에 두어야 하는데, 말 그대로 ‘뿌리’채 바꿔야 한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하나님을 단지 유한한 인간에 대하여 ‘무한한 존재’로만 인식해서는 뭔가 부족하다. ‘초월자’, ‘전능자’ 등으로 이해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단순히 전능하신 분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뿐이라면 우리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만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부딪혔을 때만 찾는 분,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만 찾는 분, 그런 분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요술램프의 ‘지니’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전능자’로서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신이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만드신 분, 우리 자신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당신의 계획대로 통치하시며 섭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이로써 우리의 모든 인격-영혼과 육체-과 모든 삶-신앙과 생활- 가운데 하나님과 관계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것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다시 한번 이 고백이 우리 신앙과 생활의 기초가 되기를, 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일에 바탕이 되기를 바란다.

by 나쥬니

태그 :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 창조, 이방인, 전도, 철학

나쥬니

오랜만에 가정예배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설교 원고도 준비했습니다. 직접 문장을 작성해서 설교해 보는 건 처음입니다. 허투루 설교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문장을 이어가다가 설교의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제어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첫 설교 원고를 (문체도 설교체에서 칼럼체?로 바꾸고^^) 조금 수정해서 올립니다. 수정하면서 보니 빠진 부분이 더러 있어서 아쉽네요. 다음 주에 다시 재방송할까? ^^

2006-09-22 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