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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명령 (창1:26-28)

인류의 가장 큰 사명은 창조 질서에 맞게 창조 계획을 따라 피조물을 잘 다스리는 것, 즉 하나님의 창조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창1:28 말씀을 ‘창조명령(Creation Mandate)’ 혹은 ‘문화명령’이라고 한다. ‘복을 주시며’라는 표현 때문에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5대 축복이라고도 하는데,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다섯 가지다. 하지만 실제로는 명령에 가깝다. 그리고 의미상으로 보면 결국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두 가지 명령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는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조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좋다’는 말은 ‘선하다(good)’는 뜻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이것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했듯이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를 물리치는 근거가 된다. 그 선한 창조계를 다스릴 존재로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창1:26).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창1:27).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의’, ‘거룩’, ‘지식’ 세 가지 영적 특성으로 설명한다(엡4:24;골3:10).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고, 거룩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지으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지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땅에 충만하라고? 땅을 다스리라고?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은 다른 생물에게도 하셨으므로(창1:22),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창조명령(창1:28)’에서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에 더욱 무게가 실려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에서는 사람이 땅을 다스리는 형태가 드러난다. 한 사람에게만 이 땅(the earth)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나온 인류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듯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도록 계획하셨다. 그것은 문화와 문명의 발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창조명령을 ‘문화명령’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기에 동산(garden)으로 시작했지만, 요한계시록에서 그리고 있는 새 예루살렘은 도시(city)이다.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이 창조명령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분명히 왜곡되었다. 죄로 인하여 여자는 잉태의 고통이 더하였고, 남자는 ‘먹기 위하여’ 종신토록 수고해야 하는 징계를 받았다(창3:16-19).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땅에 충만해야 하지만 심한 고통이 따르게 되었다. 땅을 다스려야 하는데 먹고 사는 일조차 힘겨워졌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창조명령을 수행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출산의 고통, 노동의 수고 자체가 죄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겠다(greatly increase)’고 하셨다(창3:16). 성경이 ‘고통의 증가’를 말씀하고 계시므로 출산의 고통 자체는 창조 질서에 포함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타락 전에는 아무도 출산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우리가 부활한 후에는 더 이상 출산하지도 않을 테니(마22:30) 타락 전의 고통이 어떠했을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의 고통 자체를 죄의 결과로 보는 것은 창조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노동이나 일(work) 자체를 죄의 결과로 보는 것 역시 오해다. 마치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마냥 먹고 놀았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창2:5에서는 아직 들에 초목이 없고, 밭에 채소가 나지 않은 이유를 ‘경작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시면서 그 동산을 ‘다스리고(work) 지키게(take care of)’ 하셨다(창2:15). 이들은 모두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일을 하는 것 역시 창조 질서의 일부이다. 다만 창3:17-19에서는 사람이 ‘먹기 위하여’ 땀 흘려 수고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던 것과 선명하게 비교된다(창2:16).


창조의 발전

창1:28 말씀을 창조명령, 문화명령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용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문화명령’이라는 표현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는다. 대부분 문화나 문명 자체를 죄악시 하거나 타락의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work)을 타락의 결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해다. 창조계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있어서 문화는 필수다.

물론 역사 초기에 야발, 유발, 두발가인 등이 발전시켰던 문명은 ‘타락한 문화’의 전형이다(창4:20-22). 라멕의 노래(창4:23-24)는 끔찍하고 잔인하다. 이들 문화는 분명히 선하지 못하고 그 동기가 불순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문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육축 치는 것(창4:20)이나 수금과 퉁소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창4:21) 자체는 죄가 아니다. 기계(창4:22)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노래(창4:23-24)가 인간에게 영원히 금지되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살인자 가인이 처음으로 도시를 만들었는데(창4:17), 그 때문에 도시 문명 자체를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새 예루살렘도 역시 도시이다!)

인류 역사상 거의 대부분의 문화가 타락 후에 발전했기 때문에 문화를 타락의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계획으로 볼 때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다행하게도 우리는 성경에서 아주 희미하게나마 타락 전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1) 창2:5에서는 ‘경작’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것은 들에 초목을 심고, 밭에 채소를 심는 것이다. 그것은 원시적이기는 하겠지만 우리에게 ‘농업’, ‘노동’을 설명해 준다. 그것은 인간에 의한 문화다.

2) 창2:19-20에는 아담이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아담이 각 생물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과학’의 영역이다. 또 언어를 사용하므로 ‘문학’이고, ‘학문’이다. 그것도 역시 인류의 문화다.

3) 창2:23에서 아담은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다. 이 역시 ‘과학’, ‘문학’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또 24절에는 ‘가정’이라는 ‘사회’가 소개되고 있다. 이 또한 문화다.

4) 창3:7에서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가 등장한다. 비록 선하지 못한 동기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지혜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의류’ 역시 문화다. 더불어 3:21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주신 ‘가죽옷’이 등장하는데, 이미 에덴 동산에서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에서 가죽옷으로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렇듯 문화의 발전 역시 하나님의 창조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에는 사회의 구성과 확장이 포함되어 있으며,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에는 피조물을 통한 문화와 문명의 발전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모든 만물을 다스릴 존재로 만드셨다(창1:26).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가장 큰 사명은 창조 질서에 맞게 창조 계획을 따라 피조물을 잘 다스리는 것, 즉 하나님의 창조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인류, 하나님의 백성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는데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창조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2-23)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5)

그래서 바울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대하고 있다고 전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피조물들을 원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19-22)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지만’ 타락한 죄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왜곡하고 부패시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창조명령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수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고후4:4;골1:15)께서 그 백성들을 피로 사셨기 때문이다(마1:21;계5:9-10).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시기 때문이다(엡4:24;골3:1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땅을 다스리라’는 창조명령에 순종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2:9-10)

by 나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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