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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에 갇히신 성령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전3:16).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사망의 권세를 꺾으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후, 드디어 '임마누엘(마1:23)'의 시대가 온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런데 거기에 누군가가 '마음'이라는 울타리를 하나 추가시켰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1.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
2.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신다.

이런 설교 말씀이 울려퍼졌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단다,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그 때 대답하신 말씀이... 순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하신 말씀이 떠올랐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고 하셨단다. 그 후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가 이어진 걸 보면 아마도 눅17:20-21 말씀이 인용된 듯하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 묻거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하지만 그 말씀은 그게 아니다. 상황도 다르다. 그 말씀에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었다. 또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물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를 개인적으로 축소하여 '마음' 안에 가두고 싶다해도 그건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분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마음 안에 계신 성령, 마음 밖에 계신 성령

설교는 또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마음 문이 있는데 그 문에는 고리가 안에만 있단다. 그래서 안에서만 열 수 있고, 밖에서는 열 수 없단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문밖에서 두드리시는데, 문을 열지 않으면 여실 수 없으신단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리지 않으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으신단다. 그렇다면 아까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던 성령은 누구이며,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여야 할 성령은 또 누구인가? 또 다른 성령이 계신 걸까? 아니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락날락 하신다는 건가?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관계도 적은 말씀에 '마음'이라는 이상한 개념까지 섞어놓으니 도대체 앞뒤가 맞지도 않는 설교가 된다.

도대체 이 설교의 대상은 누구인가? 성령께서 누군가의 마음 안에 계신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성령께서는 아직 그 안에 계시지 않은 것이고 그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고, 또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성령을 맞이해야 한다면 그건 모순이다. 성령이 둘이 된다.

장로교회에서 이런 설교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교리와 신학의 중심은 여전히 칼빈주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번 우리 안에 거하신 성령은 절대로 떠나지 않으신다'고 확인했지만, 이미 설교는 모순 덩어리 궤변이 되고 말았다. 한 개인에게 성령은 함께 계시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두 가지 경우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잘못되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실 수 없는 성령은, 그런 하나님은 칼빈주의에 없다.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도 사람이 손을 내밀지 않으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알미니안이다. 개혁주의(칼빈주의)는 성령께서 인치신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고 가르칠 뿐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1:6)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9)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알파코스'라는 은사주의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한 장로교회의 모습이다. 혼합주의 앞에 교리와 신학은 비참하게 무너진다.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성경'이라고 하겠지만, 그 다음에는 기록된 '성경'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교리가 허물어지는 게 아니라 결국에는 성경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이다.

대개 다른 복음을 전할 때, 교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신학적인 이론, 즉 교리가 있게 마련이다. 기존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신이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신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처럼 말이다.

교리 없는 신학이란 없고, 신학 없는 신앙이란 없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건 신앙이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 없다면 믿음은 있을 수가 없다. 믿음이 없다면 당연히 그에 따르는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앙도 없고, 신앙생활도 없는 것이다.

교리가 어설프게 섞이고, 그래서 신학이 무시되면, 결국 신앙은 무너진다. 교리 없는 설교가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 마음 밖에 가두어 버린 것처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by 나쥬니

태그 : 성령, 마음, 임마누엘, 하나님의 나라, 장로교회, 칼빈주의, 개혁주의, 알파코스, 은사주의, 교리,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