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섹션 : 신앙/성경

삶의 체계로서의 칼빈주의

'삶의 체계(life system)'란 말은 독일어 'Weltanschauung'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계관(worldview)'이라고 더 잘 알려진 이 표현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을 방문하여 강연했던 칼빈주의 강연의 첫 번째 주제로 선택되었다. 칼빈주의를 세상 한구석의 종교사상이 아닌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여겼던 카이퍼의 확신에 찬 강연에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그는 신대륙의 젊은 신학도들에게 칼빈주의가 전포괄적 삶의 체계를 소유하고 있음을 내세우는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칼빈주의의 개념

칼빈주의의 개념은 시대적으로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 이 말은 로마 가톨릭이나 유대인들이 개신교도들(심지어 무신론자에게도)을 통틀어서 비난할 때 사용했던 분파적 이름이었다. 또한 예정 교리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에 대하여 교의적 편협성을 꼬집는 표현이기도 했다. 카이퍼는 이것을 고백적 용법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도덕적 생활의 참된 진지성을 위태롭게 하는 자라는 뜻에서 '칼빈주의자'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장 칼빈이 비판했을 용법은 교단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였는데, 이를테면 '칼빈주의 침례교(스펄전)', '칼빈주의 감리교(휘트필드)'와 같다.

이렇듯 칼빈주의가 분파주의적, 고백적, 교단적 용법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개념 체계는 학문적 이름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칼빈주의는 종교개혁이 루터파나 재세례파나 소키누스파가 아닌 방향으로 움직인 경로를 일컫는다. 철학적으로는 칼빈의 지도에 영향을 받아 인생의 몇몇 분야를 지배하게 된 체계이고, 정치적으로는 화란, 영국, 미국에서 입헌적 정치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했던 정치적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카이퍼는 '전세계적으로 인생과 사유에 독립적 형태를 발전시킨 독립적인 전체 경향'으로서, 즉 학문적 의미에서 칼빈주의를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칼빈주의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기독교 종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사상을 가지고 '삶의 체계' 운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칼빈주의의 범위는 종교개혁 정신을 꿰뚫는다. 프랑스의 '위그노', 화란의 '가난한 자(beggars)', 영국의 '청교도', '장로교도', 북미의 '필그림 파더즈' 등은 칼빈주의의 산물이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교회들 역시 순수한 칼빈주의에서 이탈하기는 했을지언정 그 영향 아래서 태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교회, 독립교회주의자, 감리교, 침례교 등의 시작은 모두 칼빈주의적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분파적 경향은 칼빈주의의 자유로운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같은 종교개혁의 뿌리에서 칼빈주의와 유일하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루터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루터교는 엄밀하게 말해서 로마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칼빈주의는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교보다 기독교 이념을 훨씬 순수하고 정확하게 구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교(이방종교), 이슬람교, 로마교 등의 거대한 삶의 체계와 함께 칼빈주의를 나란히 놓을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안다는 것은 '삶의 체계'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교, 이슬람교, 로마교는 모두 이런 의미에서 삶의 체계로서 인정할 만한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본래의 의미에서 퇴색되면서 점점 목적과 방향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칼빈주의가 기독교 이념을 대변하여 삶의 체계로서 인정받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체계 : 하나님과의 관계

삶의 체계로서 충족되기 위해서는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근본 관계에서 확실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그 세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이다.

먼저 이교는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이와는 정반대로 이슬람교는 하나님을 피조물과 분리시킨다. 로마교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교회라는 중간 고리를 두어 삶의 체계를 창출했다. 그럼 칼빈주의는 어떠한가? 칼빈주의는 이교처럼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며, 이슬람교처럼 하나님을 피조물과 분리시키지 않으며, 로마교처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매개적 종교 단체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위엄 가운데 계시지만, 성령 하나님으로서 피조물과 직접 교제를 맺으신다. 이것이 칼빈주의의 예정 고백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예정은 인간과 인간을 구분하거나 개인적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내적 자아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교에 대한 칼빈주의자의 반대는 무엇보다도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교회를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개신교의 일반적인 특징을 칼빈주의의 고유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에 대하여 칼빈주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루터교가 유일한데 이미 언급한 대로 루터교는 로마교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카이퍼는 루터와 칼빈을 비교하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제라는 근본적 해석에 이른 것은 칼빈주의가 유일하다고 강변한다. 루터 역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제를 위해 싸웠지만, 주관적이며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도전하였다. 여전히 그는 교회를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있는 대표적이며 권위적인 교사로 보았고, 로마교의 성례관과 의식에 의지하고 말았다. 하지만 칼빈의 접근은 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일반적 우주론적 원리에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바로 신자 안에서 교회를 보았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 이어지는 선을 그었다.

또 다른 반문은 현대주의가 원칙상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다"는 외침의 프랑스 혁명에서 생겨났는데, 어떻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으로 삶의 체계를 추론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로마 교회를 통해서만 신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교회의 권력을 전멸시키기 위해 선포한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사실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특수한 해석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오히려 모든 일반적인 삶의 체계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칼빈주의의 근본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삶의 체계 : 인간과의 관계

이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규정된다. 이교는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 거한다고 믿기 때문에, 신적 우월성이 인간 가운데 생겨나 계급을 만든다. 인도와 이집트의 카스트 제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노예가 되며, 카피르(불신자)는 회교도의 노예가 된다. 로마교는 구별의 절대적 특성을 극복하고 상대적으로 만들어서 인간과 인간의 모든 관계를 위계적으로 해석한다. 정반대로 현대주의는 모든 차이를 부인하고 모든 구별을 공통의 수준에 놓으려고 한다. 심지어는 남녀의 구분까지도...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서로 동등한 자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재능 외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권위와 재능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주시는 것이다. 민주주의 발전과 평등 이념 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칼빈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차이는, 프랑스 혁명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 통일을 이룬 반면,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통일된 열정으로 인하여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삶의 체계 : 세계와의 관계

삶의 체계를 해석하는 마지막 조건은 세계를 향한 태도이다. 이교는 때때로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하게 여김으로써 세계를 너무 높게 평가한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세계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 로마교는 교회와 세계를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보았다. 교회는 성화되고 세계는 저주 아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세계는 교회의 보호와 훈계를 받아야했다. 이러한 이원론적 상태는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고상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교회를 부패시켰고 교회는 세상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칼빈주의는 이러한 사상과 개념에 한마디로 개혁을 가져왔다.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 존중되어야 한다. 구원을 이루시는 특별은혜와 창조주로서 자신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베푸시는 일반은혜가 있다는 위대한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세상 생활을 교회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세상으로부터 피하는 수도원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삶의 모든 지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가 강조된다. 그래서 청교도의 맑은 정신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모든 생활을 다시 정복하는 일로 이어졌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또한 교회 안에서 세상의 유혹과 죄를 이기기 위한 힘이 결집되었다.


세계를 덮는 칼빈주의 체계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강의를 독특한 주장으로 마무리한다. 인류의 발전과 혼혈을 연관지어서 역설하는데,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바벨론, 이집트, 그리스, 이슬람 세계에서 있었던 다양한 민족의 혼혈을 말한다. 또한 로마 제국으로 세계의 지도력이 넘어갔을 때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에서 일어난 민족의 혼합을 말한다. 더 나아가 칼빈주의가 융성했던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여러 민족이 결합했고 그에 따라 생활 수준이 높아졌음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자유의 땅 미국에 서서 칼빈주의와 인종의 교류를 연결시키고 있다. 역사적 국가들이 자신의 구성원을 재연합하는 과정을 보면서, 아마도 카이퍼는 인류의 발전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으로 혼혈이 인류의 발전을 촉발시켰음을 상기하면서, 또다시 칼빈주의의 영향으로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 세계 모든 민족이 모이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다. 카이퍼는 단순히 문명의 발전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강연은 1898년에 있었다. 그의 강의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 이 물결은 그리스에서 로마 제국으로 옮겨갔다. 로마의 나라들에서 유럽의 북부로 계속 나아갔고, 네덜란드와 영국에, 마침내 여러분의 대륙에 도달했다. 현재 이 흐름은 정지 상태이다. 중국과 일본을 통하는 서쪽 길이 막혀 있다. ...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비밀은 여전히 신비 속에 가려 있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이 세계적 물결의 경로를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카이퍼는 칼빈주의에 실린 하나님의 진리가 미국을 통해 우리에게 당도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칼빈주의가 삶의 체계로서 세상을 온통 뒤집어엎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요약/편집 : 나쥬니 (www.nazuni.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