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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의 열매

칼빈주의와 종교 [1] [2] [3]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

'칼빈주의의 신앙고백(특히, 성도의 견인과 예정 교리)은 필연적으로 너무 쉬운 양심과 위험천만한 도덕적 방종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의 열매로서 칼빈주의를 생각할 때 줄곧 지적되는 것이다. 칼빈주의 교리가 부주의하고 불경건한 생활을 낳고 있다는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하고 간단하게 답한다.

반율법주의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불경건한 탐욕으로 칼빈주의 신앙고백이 남용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칼빈주의적 진지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영혼으로부터 전능자의 위엄에 놀라고 영원한 사랑의 강력한 능력에 복종하여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할 것을 확신하는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 앞에 떨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규례

성경을 삶의 원리로 강조하는 순간 또다시 율법주의라는 누명을 쓰지만, 율법주의는 율법의 성취로 구원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비하여 칼빈주의는 모든 구원의 공로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속 열매로만 돌린다. 물론 칼빈주의는 모든 윤리적 연구를 시내산의 율법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의 심비에 거룩한 뜻을 심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참된 요약으로서 시내산의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가 하나님의 규례를 믿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삶이 창조에서 실현되기 전에 하나님 안에 먼저 있었다는 확신에 의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된 세계는 필연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법칙을 갖고 있다. (궁창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땅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우리 몸에 흐르는 피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심장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미학의 영역에서 우리의 상상력에 대한 규례가 있으며, 도덕 영역에서 인간 전체 생활에 대한 엄격한 규례가 있다.)

하지만 칼빈주의는 이것을 '너는 ~해야 한다'는 입법자의 개념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 규례들은 마치 벗어버려야 하는 멍에처럼 강제력에 의해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광야에서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발자취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숨이 가쁠 때 우리는 사람의 호흡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숨을 고르면서 정상 상태로 회복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는 자연의 법칙이나 일반 도덕 규례, 그리고 좀더 특별한 기독교적 계명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불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도덕적 세계 질서 말고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양심 안에 종교와 윤리의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모든 것을 두는 것이다.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는 하나의 현실로서 모든 생활에, 즉 가정에, 사회에, 학문과 예술에, 개인 생활에, 정치 활동에 덧붙여진다. 세상에 대한 '기피'는 재세례파의 표어였다. 오히려 칼빈주의는 이것을 논박하고 부인했다. 두 세계, 즉 나쁜 세계와 좋은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동일한 자아인 것처럼, 저주로 고통받고 타락 이후로 일반 은총에 의하여 보전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어 심판의 공포를 지나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동일한 세계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교회에 갇혀서 세상을 그 운명에 내버려 둘 수 없다.

칼빈주의자는 이 세상의 발전을 훨씬 높은 단계로 밀고 올라가되,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올라가며 '좋은 소식'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지탱하려고 한다. 이러한 불굴의 힘으로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상업과 무역, 수공예와 산업, 농업과 원예, 기술과 학문에까지 새로운 추진력을 갖게 한다.


카드놀이, 극장, 춤

하지만 한 가지 예외를 들고자 한다. 이것은 이 세상의 너무도 신성모독적인 오락으로서 칼빈주의가 금지하는 것인데, 카드놀이, 극장, 춤 이 세 가지이다. 물론 그 자체로 그것들이 악한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눈과 재빠른 행동과 폭넓은 경험으로 결정되는 놀이는 그 성격이 고상하고, 소설, 연극(약자주-당시 시대상으로는 주로 연극을 염두해 둔 것이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영화도 포함할 수 있겠다.) 등에 필요한 상상력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며, 춤 역시 그 자체로 반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다만 칼빈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에 의지하기보다 기회나 운에 의하여 불신에 빠지고 우연을 갈망하게 만드는 카드 놀이였으며, 관객을 즐겁게 하려고 배우들에게 도덕적 희생을 요구하며 번창하는 극장(연극,영화)이었으며, 쉽게 음란함에 빠지게 만드는 춤이었다. 칼빈주의는 위험한 환희에 빠져서 신앙의 진지함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희생시키는 모든 것을 반대한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도덕 영역의 곧은 길을 발견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도덕이라는 건물의 기초는 점점 흔들리고 있다. 정치가와 법률가는 강자의 권리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정직은 조롱당하며, 범신론자는 예수님과 네로를 같은 자리에 놓으려 하고 있으며, 니체는 그리스도의 복을 인류의 저주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는 세상이 윤리적 철학 이론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양심의 회복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추론에 몰두하지 않고, 우리 영혼을 곧장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면시킨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적 반성과 함께 낮아지며, 경건하고 고상한 도덕적 절제의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요약/편집 : 나쥬니 (www.nazuni.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