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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 전체 우주의 회복

칼빈주의와 학문 [1] [2] [3] [4] [5] [6]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장려했다는 첫번째 요점을 떠나, 칼빈주의가 학문을 제 영역에 회복시켰다는 것을 고찰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는 영적인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 우주론을 회복시켰다. 십자가에서 창조로 돌아가도록 장려하는 그 일반적인 원리와 일반 은총 교의를 살펴보자.


자연과 은혜를 분열시키는 이원론

모든 사람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구원론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구원'의 문제는, 영원의 빛을 보지 못하고 내세와는 상관 없이 이 땅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 그래서 이 두 요소가 죄인과 성인,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 지상적 생활과 천상적 생활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그들의 상호 연관을 보지 못하고 서로를 왜곡하는 위험이 있다. 고백컨대 (중세의) 기독교 세계는 이 오류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중생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은 자연과 은혜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이원론적 개념은 천상적 사물을 너무 집중적으로 명상하므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하여 마땅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영원한 것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 때문에 현세적 의무를 이루지 못했고, 영혼만 보살폈기 때문에 몸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했다. 이 편협되고 부조화스러운 개념은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신비적으로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구주로만 인식되고 그분의 우주론적 의의는 사라졌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하지만 이 이원론은 성경이 결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만물을 만드시고 사람의 생명이신 영원하신 말씀(요1:1-4;요일1:1-2)"이라고 했고, 바울도 "만물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음을 받고 존재한다(롬11:36)"고 증거한다. 또 바울은 구속 사역의 목적이 각 죄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구속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이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라고 증거한다(엡1:10;골1:20). 그리스도는 땅의 중생만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주의 새롭게 됨도 말씀하시고(마19:28),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8:19)"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요한이 밧모 섬에서 들은 찬송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 모든 존귀와 찬송과 감사를 돌리는 것이었다. 요한계시록은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성경에 예시되어 있는 미래의 최종적 산물은 구원받은 영혼들의 영적 존재뿐만 아니라 전체 우주의 회복이다. 그 때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중요성에 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엄위를 계시하신 창조계는 그분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것이다. 비록 죄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길이 열리고 회복에 관한 훨씬 더 영광스러운 계시에 합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복은 처음 창조된 것의 구원이며, 계속 구원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직은 영원히 찬송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중보직도 결국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광채가 아무리 장엄하다 해도, 결국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실 것이다. 이로써 칼빈주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현세적인 것에 대한 무시와 우주적인 사물에 대한 평가 절하를 단번에 종식시킨다. 우주적 생활은 영원한 것을 희생시켜 그 가치를 회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계시로서 그분의 능력으로 그 가치를 회복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 : 성경 + 자연

칼빈주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을 아는 두 방도, 즉 '성경'과 '자연'을 말하는 사실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칼빈은 많은 신학자들의 경향과는 달리 자연을 단순히 부속되는 항목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안경에 비유하여 이 안경으로 우리가 자연의 책에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다시 해독할 수 있게 한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자연에 전념하는 자가 헛되고 어리석은 일들을 추구하면서 그 능력을 허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모든 두려운 우려가 사라졌다. 반대로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관심이 자연과 창조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파악했다.

인본주의가 이 세상의 생활로 영원한 것을 대신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모든 칼빈주의자는 인본주의자에 반대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가 세속 생활을 적절히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만큼, 칼빈주의자는 그의 동맹이었다.

[계속 글이 이어집니다.]

요약/편집 : 나쥬니 (www.nazuni.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