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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대학 설립

카이퍼 박사가 신경쇠약으로 남부 유럽에서 요양을 하고서 1877년 5월 화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립학교에 대해 재정 보조를 하지 않겠다는 헤임스케르크 내각의 고등교육 법안이 입법화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 법안에는 학교에 5개 학부(교양, 신학, 법학, 의학, 자연과학부)를 설치한다는 조건으로 사립대학 설립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는 했다.
개혁교회들은 모더니스트들이 판치던대학 신학부의 폐지를 주장하였지만(순수한 신학교 설립의 방편을 위하여), 자유주의자들을 옹호하던 국회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학'이란 명칭을 유지한 채 '종교학'을 가르치면서도 기존의대학에서 신학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신학과 종교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정부는 국가교회 총회에서 지명하는 교수들을 재정 지원하도록 하였으나, 그 대상이 된 6명의 교수들 중 5명이 자유신학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퍼는 '온건하고 자유로운 칼빈주의적 국가대학'의 섭립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가 꿈꾸는대학은 신학부만을 포함한 신학교가 아니었고,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회복과 정화를 이룰 기독교대학이었다.
그리고 소유, 운영, 통제 등에 대하여 어떠한 외부 간섭도 허용하지 않는 '자유'를 갖기를 원했으며, 하이델베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를 신학교육의 토대로 인정하는 개혁주의적 학교여야 했다.
또한 그 학교는 국가의 장래를 책임지는 국가대학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주어진 여건은 아주 나빴다.
재원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았고, 학교 이념에 맞는 헌신된 교수들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졸업 후 뚜렷하지 않은 장래를 보면서 그 학교에 지원할 학생들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1878년 12월 5일 개혁주의 원리에 기반을 둔 고등교육협회가 우트레히트에서 조직되었다.그리고 3개월 뒤 협회규칙을 국왕에게서 동의받았다.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이퍼는 헤라우트지와 소책자 발행 등으로 논쟁을 벌여나갔다.
암스텔담을 대학 설립 도시로 채택을 하고서, 1879년 11월 7일 지도위원들은 카이퍼 박사와 루트헤르스 박사를 대학의 신학부 교수로 미리 임명하였다.
그리고 두 교수는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힘썼다.

드디어 1880년 10월 20일 '자유대학(Free University)'을 개교하였다.
카이퍼 박사는 "삶의 각 영역에 있어서의 주권"이라는 제목으로 개회 연설을 했다. (카이퍼를 자유대학의 설립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의 넓은 이상, 그의 박력있는 지도력, 그의 훌륭한 설득력, 그의 강력한 영향력, 그의 탁월한 조직력, 그의 엄청난 추진력 때문이다.)

1880년 12월, 자유대학은 5명의 교수와 5명의 학생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카이퍼 박사는 자유대학의 초대 초장으로 섬기면서, 주로 조직신학과 '신성한 신학의 백과'를 강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설교학, 화란문학, 미학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881년 10월 20일 그는 루트헤르스 박사에게 총장직을 넘겨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파괴적 영향력을 끼치는 현대 성서비평"이라는 연설로 아브라함 커넌(한때 카이퍼의 교수였던)을 태두로한 자유신학의 성경파괴운동에 대항하였다.

카이퍼 박사는 1880년대에 학교와 신문을 통해서 방대한 종교, 신학 저술을 펴냈다.
자유대학에서 계속된 강의와 "철과 진흙", "두 왕국", "칼빈주의와 예술" 등의 연설은 국가와 교회를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아주 적절했다.
헤라우트지(종교 주간지로 변경하고, 정치적인 부분은 슈탄다트지에서만 다루고 있었다.)의 운영 편집장이었던 그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약 3년 동안의 논설 연재를 이었고 이것을 1889년에 3권의 책으로 인쇄하였는데, 성령의 사역을 통일되고 체계적으로 해명한 최초의 화란 신학자가 되었다(프린스톤대학의 워필드 교수와 견줄만한).
또 그 신문을 통해 계속된 명상록을 출판했고, 화란의 교회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전했다.
또 "말씀에서", "안식일", "야곱의 열 두 사람" 등의 논문을 출간했다.

1890년대에 자유대학의 학생수는 90명에 이르렀다. (1890년에 화란의 3개 국립대학의 총 학생수는 1,800명이었다.)
학교는 교수도 부족했고, 의학부와 자연과학부도 신설해야 했다.
자유대학은 재정적으로도 빈약하고 법적제한이 비참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괄목할 만한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카이퍼가 1880년대에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사실 상상하기 힘든 결과이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자유대학 2개 학부에서 강의하였고, 교회개혁 운동의 주요 역할을 담당했고, 일간지인 슈탄다트지를 편집했고, 또한 1890년대에 나올 책들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광범위한 서신교환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무엇이 바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개혁해 나갔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청년들에게 전투적인 삶과 자기부인의 삶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는 그들에게 목회를 통해서 재정적인 보장을 받게 하거나 목회자적 향취에 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넘어서 그들에게 찾아오는 십자가의 영광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 청교도들처럼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할 화강암과 강철 같은 자들을, 구약의 언약을 믿던 자들처럼(모리스의 말을 빌려) 만일 필요하다면 살아있는 마귀와 직접 전투를 벌이려 하는 자들을, 평안하고 안정되며 존경받는 자리를 선망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전쟁을 담대히 싸우며, 주의 이름을 위해 부끄러움과 비난에 처한다고 해도 밤중에라도 찬양을 드리는 자들을, 한마디로 말해서, 총회 소속이나 친구시늉하는 자들의 호의에 자신의 희망을 두지 아니하고 도리어 성령과 능력에 충만하여 여러분들이 자신을 부르신 그분을 믿는 것처럼 믿는 자들을 훈련시키기를 원합니다."

- 1882년 7월 5일 고등교육협회 정기대회 기도회 설교 中에서

요약/편집 : 나쥬니 (www.nazuni.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