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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을 위한 투쟁

국왕의 칙령으로 화란의 전국 신교교회가 '국가교회'로 바뀐 것은 1816년이었다.
총회가 지도하는 그 체제는, 1852년의 헌법 23조를 보완하여 1867년에 민주주의적인 방식(교회 선거를 통한 대표자 선출)을 교회에 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개혁주의에서 자유주의와 그 신학으로 흘러갔다.
1880년에는 화란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4백만명)이 국가교회에 등록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교회 총회는 1883년에 목사 후보생들이 연합의 3형식(the Three Forms of Unity;하이델베르크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에 따라 설교하겠노라고 하던 서약을 삭제하였다.

이에 대해 '23조'에 의해 미약하게나마 교회재판소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개혁주의자들은, 카이퍼 박사가 주도하는 암스텔담 교회재판소를 중심으로 힘을 모았다. (1883년 당시 46세)
(암스텔담 교회는 시단위 조직으로 28명의 목사, 138명의 전체재직회, 165,000명의 전체교인, 10개의 예배당, 4개의 부속예배당이 있었다.)
그리하여 개혁주의적 신앙고백을 기준으로하는 전국규모의 대회를 암스텔담에서 가졌고, 여기서 총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연합의 3형식'에 서명하지 않는 자들은 목회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렇게 드러난 암스텔담 교회재판소와 교회당국 간의 갈등은, 목회 자격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견신례' 문제로 확산되었다.
교회에서 성찬 참여와 같은 실질적인 권리를 주는 견신례를 교회재판소에서는 목사와 한두명의 장로를 대표로 하여 그 후보자를 심사하도록 했는데, 1867년 이후 교회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통주의, 개혁주의 성향의 장로들 때문에 자유주의적인 목사들은 자유주의적인 청년들에게 마음대로 견신례를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총회는 종교적 견해로 인해 행실이 바른 신앙고백자들이 성도의 교제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없다고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정통주의적인 목사와 교회재판소에 속해 있는 자유주의 청년들도 이웃의 자유주의적 교회재판소에서 '선량한 도덕적 증명서'를 받아 슬그머니 교회로 들어올 수 있었다.

1884년 후반 암스텔담 교회에는 세 명의 자유주의 목사가 있었는데, 이들에게 견신례를 받고자 했던 후보자들이 장로들의 참석 거부로 인정받지 못하자 그 부모들은 교회재판소에 항의했다.
교회재판소 역시 장로들의 편을 들자, 1885년 3월 그들은 다른 '우호적인' 교회재판소에 증명서를 요구했고 그 교회에서도 신앙고백이 없는 자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급기야 이들은 고전이사회와 주 이사회에 청원하였는데, 1885년 10월 24일 주 이사회에서는 6주 이내로 이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가교회 조직상 권위는 '총회'-'주 이사회'-'고전이사회'-'교회재판소' 순이었다.)
11월 5일 처음으로 그 소식을 접한 암스텔담 교회재판소는 자기들의 소견도 듣지 않고 내린 결정에 반발하여, 총회에 백지화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고 요히려 1886년 1월 8일까지 증명서를 발부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12월 3일 암스텔담 교회재판소는 총회에 증명서 발부 문제에 관한 제안을 제출했는데, 이는 찬성자들이 제명이나 정직도 당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12월 14일에 모인 전체 교회재판소에서 교회 운영권 확보를 위한 41조 개정을 80명의 찬성표로 채택하였다.

암스텔담 교회재판소와 당국간의 갈등은 깊어갔다.
1886년 1월 4일 오전에 소집된 고전이사회는 136명 중 80명의 교회재판소 회원(카이퍼 포함)을 정직시켰다.
그 날 오후, 56명으로 구성된 교회재판소는 재빨리 증명서 발부 문제를 해결해 버리고는 교회재판소의 문을 닫아버리고 물리적으로 제지하였다.
1월 10일 주일, 정직된 5명의 목사와 카이퍼, 그리고 그 동료들은 예배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강당을 빌려 '성경강독회'라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1886년 내내 계속되었고, 곧 열렬한 반응 속에 여덟 개의 강당에서 주일마다 초만원으로 모였다.
그리고 조직된 교회의 예배가 아니었기에 목사들은 성례를 행하지 않았는데, 병때문에 교회재판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 정직을 면했던 레니어 목사가 설교하는 암스텔담 국가교회 예배 때에 개혁 그룹 구성원들은 성례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카이퍼와 동료들은 국가교회 예배당을 물리적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굴복도, 혁명도 원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80명 중 5명이 교회로 돌아갔고, 3월 15일 고전이사회는 75명의 암스텔담 재직회원의 파면을 지방이사회에 제안했다.
7월 1일 지방이사회가 이를 인준했고, 9월 24일 소총회가 지방이사회의 결정을 인준했으며, 12월 1일 전체총회는 75명의 면직을 확정지었다.
이로써 국가교회는 개혁주의자들에게 쓴맛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을 합법적인 교회재판소라고 여기는 75명의 임원들은 이를 계기로 총회 조직과의 연대를 끊었다.
1886년 12월 16일 카이퍼가 쓴 소책자를 통해, 암스텔담 교인 7,000명이 75명의 임원들을 교회의 정당한 교회재판소로 인정하게 되었고, 교회재판소는 이제 정규적인 설교, 성례집행, 기타 교회기능을 회복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추어 1887년 1월 또다른 집회를 소집했는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행동을 회피하는 자들을 배제하였음에도 암스텔담에서 300명, 다른 지역에서 1,200명이 참가했다.
이러한 자율적인 지역교회는 '연합의 3형식'과 도르트 교회모범을 따라 생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1887년 집회 후 200개의 회중교회가 10만명의 전교인과 함께 국가교회를 떠났다.

곧 국가교회는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개혁그룹'에게서 교회건물을 빼앗는 일은 흔했다.
개혁주의 입장의 세입자들을 교회 소유의 집들에서 쫓아냈다.
총회주의자들은 교회서적과 문서, 기록을 찾으려고 집들을 뒤졌다.
시당국은 시민 보호를 거의 포기하였는데, 심지어 깡패들이 개혁그룹 사람들을 습격해도 놔두었다.
총회와 이사회는 시장, 경찰, 군인, 지역 선동가, 언론들의 지원을 받았다.
1888년 6월 15일, 화란 최고법원은 개혁그룹의 교인들과 교회가 교회건물, 기금, 기타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고 판결했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개혁그룹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영향력 있는 정통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은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당시 카이퍼의 활동이 교회 내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비판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카이퍼는 반혁명당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교회개혁 운동의 지도자들 역시 반혁명당의 대표인물들이었다.
당연히 그 반대자들은 왜곡된 보도, 편벽된 편집 등으로 정치적인 공세를 펼치면서,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카이퍼와 그의 조직이 국가 분열을 조장하여 교회의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려고 한다고 흠집을 내었다.

또한 카이퍼와 그의 동료들은 자유대학의 유력인사들이었다.
총회주의자들은 카이퍼가 교회 내에 분열을 조장해서 그 졸업생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려고 한다고 과장된 비난을 했다. (1885년 자유대학에는 단 한명의 신학부 졸업생도 없었는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카이퍼의 지도력을 꼴사납게 여겼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카이퍼 박사는 헤라우트지와 슈탄다트지를 통해 진정으로 교회개혁에 관심있는 자들을 설득하고 인도하였다.
1888년에 그는 "위협적인 대결", "대결은 도래했다"라는 두 소책자를 발행했다.

그의 투쟁은 이렇게 점점 치열해져만 갔다.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 면직 직후, 경찰당국의 계속된 신변보호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요약/편집 : 나쥬니 (www.nazuni.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