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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 주님 안에서 잠들다

1905년(68세) 수상 임기를 마친 카이퍼 박사는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로 1년 남짓 여행을 떠났다.
1902년 수상직을 수행하면서 생긴 자유대학 교수직은 그 동안 바빙크 박사가 대신하고 있었는데, 여행을 돌아와서도 카이퍼는 학교의 청빙에 응하지 않고 쉬기를 원했고 1907년 70세가 된 그는 명예퇴직을 했다.
반면, 바빙크는 카이퍼가 없는 기간 동안 반혁명당 국가위원회 의장도 맡고 있었는데, 1907년 10월 그는 그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카이퍼에게 의장직을 넘겨주었다.

당시 카이퍼에게는 또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는 데 메이스터 내각의 뒤를 이어 1909년 선거에서 다시 수상이 되어 이루지 못한 입법안들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1908년 초 뜻하지 않은 내각의 퇴각으로 인해 반혁명당의 헤임스케르크(그의 부친은 자유주의자로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가 과도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고, 1909년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하면 그 내각이 연장될 것이었다.
이는 카이퍼가 의원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1908년 8월 31일 카이퍼는 국가평의회(국왕자문기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0월에는 옴멘 주 보궐선거에서 상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2월에는 다시 반혁명당 의원 클럽 회장이 되었다.
1909년 선거에서 카이퍼의 예상대로 우파는 60석을 얻어 대승리를 거두었고 자신 역시 옴멘 주에서 상원에 재선되었지만, 헤임스케르크 내각이 그 직무를 계속 수행하게 되었다.

그 무렵 카이퍼는 소위 "훈장 사건"에 연류되어 국회에서 호된 공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반혁명당의 한 기부자가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로비했다는 내용으로, 좌파 세력들은 즉각적으로 이에 대해 반응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반혁명당 내에서 카이퍼의 입지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 일은 카이퍼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후회스러운 일이 되었다.

1912년(75세) 7월 카이퍼는 건강상의 이유로 상원을 사임했다.
1913년 선거는 좌파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상원은 우파(기독교 연립)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 해 7월 8일 카이퍼는 다시 상원의원이 되었다.
1915년에는 반혁명당에 내부 문제가 발생했는데, 고위간부들간의 의견차이였다. 카이퍼는 1907,8년에 있었던 헤임스케르트의 돌발 행동을 지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약 40년간을 당수로 지내온 카이퍼의 독선적인 이미지를 비판하였다.
암튼 이런 홍역을 치른 카이퍼는 1916년1878년 정강을 재설명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다시금 당의 조직적 구조를 바로잡았다.

1916,7년에는 그가 그동안 추진해왔던 학교문제와 선거제도 문제가 어느 정도 매듭지어지고 헌법개정이 완성되었다.
그는 폐렴, 기관지염 등의 지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918년 5월 반혁명당 전국대회에서 그는 직접 연설하지 못하고 이덴부르크가 대신 읽게 했다.

1918년 선거에서 다시 우파의 승리로 가톨릭 신자를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9월 출범했다.
하지만 세계대전의 그늘에 있던 화란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정치혁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사회 민주노동당 지도자였던 트룰스트라는 군과 경찰이 정부의 편이 아님을 들어 혁명을 시도했지만, 국회 다수당이 그것을 반대하였고,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동조하지 않았다.
혁명은 곧 카이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적대자들에 있어서 그는 원흉이었다. 경찰들은 그를 호위했고 동료들은 그에게 피신을 권했지만, 카이퍼는 헤이그를 떠나지 않았다.
사회민주노동당 대회가 열리기로 되어있던 헤이그로, 전쟁 중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군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가지를 행진하며 혁명분자들에게 경고했다. 11월 18일 그들은 혁명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프리즐란드 군인들과 반혁명당 모두 81세의 노인 카이퍼의 집 앞에 모여 승리의 찬양을 불렀다.

1918,9년 카이퍼는 기관지염으로 시달렸고, 1919년 3월 그는 반혁명당 국가위원회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10월 29일 생일 직후, 다시 심각한 병으로 고생했고, 12월 18일 마지막 논설을 끝으로 슈탄다트지 편집장직도 그만 두었다.
그해 말경, 카이퍼는 오랜 친구이자 동역자였던 로만(정치적으로는 결별했던)과 편지를 교환하며 깊은 우정을 확인했고 화해를 했다.

1920년 9월 헤이크 시평의회는 카날슈트라트라는 거리의 이름을 카이퍼박사 거리(Dr.Kuyperstraat)로 바꾸었다.
9월 21일, 그는 상원의원직을 사임했다.
9월 24일, 그는 마지막으로 헤라우트지 초본을 수정했다.
10월 6일, 그의 후계자 콜린이 병문안을 했다.
10월 20일, 자유대학 설립 40주년 기념일에 학교로부터 감사 전문을 받았다. (카이퍼의 장남은 그 해 자유대학 총장이 되었다.)
10월 29일, 그의 마지막 생일에 도착한 많은 편지, 카드, 전문을 그는 스스로 읽을 수가 없었다.

11월 8일, 카이퍼는 83년간의 생애를 마치고 주님 품에 잠들었다.

11월 12일 장례일에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외부인들이 참석하지 않았고 화환이나 종려가지도 꾸미지 않았지만, 경찰의 호의를 받는 장례행렬이 장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만명의 군중이 모여있었다.
자유대학 학생들이 관을 운반했고, 내각 관료인 헤임스케르트가 정부를 대신해서, 당수인 콜린이 반혁명당과 슈탄다트지를 대표해서, 디크 박사가 개혁교회를 대표해서, 이덴부르크가 가장 친한 친구로서 연설했다.
그리고 카이퍼가 즐겨 부르던 시편 89편이 울려퍼졌다.


가족들은 카이퍼 박사가 쓴 유언장대로 묘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
1837년 11월 27일에 태어나고,
주님 안에서 잠들다.
1920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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